추리소설이 쏟아지고 있다. 예전과 달리 추리소설도 ‘골라서’ 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영천 하우미스터리 운영자,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박현주 번역가, 임지호 북스피어 편집장, 구본준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등 추리소설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올해 출간된 추리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피살’이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물부터 한국 철거 현장을 배경으로 한 법정스릴러까지 10개 작품을 추천받았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 지금, 이들 작품과 함께 서늘한 여름을 만끽해보자.

<유다의 창> 존 딕슨 카 지음·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펴냄

사랑에 빠진 젊은이 제임스 캐플런 앤스웰. 결혼 승낙을 받고자 예비 장인의 집에 들른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가 심상찮다. 건네준 위스키를 넙죽 받아 마신 앤스웰은 곧 정신을 잃고 만다. 깨어난 그 앞에 놓인 건 다름 아닌 예비 장인의 시체.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화살에는 앤스웰의 선명한 지문이 남겨져 있었다. 문과 창은 안에서 굳게 잠긴 상태, 완벽한 밀실에서 일어난 불가능한 살인이었다. 밀실의 대가로 불리는 존 딕슨 카. <유다의 창>(1938년)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탐정 역의 헨리 메리베일 경이 피고 앤스웰의 무죄를 증명하는 구성이어서,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흥미진진한 법정소설로도 읽히는 작품.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는 유다의 창. 그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이혁재 옮김·재인 펴냄

국내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히가시노 게이고를 들 수 있다. 5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전작이 모조리 소개될 기세로 끊임없는 구애가 이뤄지는 형국이다. 1996년에 출간된 <명탐정의 규칙>은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분기점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대중작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명탐정의 규칙>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눈물겨운 자학이자 진지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각 단편의 제목은 추리소설 독자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으며, 너무나도 전형적인 명탐정과 경찰이 등장해 텍스트 안팎을 오간다. 신나는 조롱과 신랄한 유머 감각 그리고 단편 추리소설로서의 완결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윤영천/하우미스터리(howmystery.com) 운영자


<가다라의 돼지> 나카지마 라모 지음·한희선 옮김·북스피어 펴냄

<가다라의 돼지>를 보는 순간, 압도당할 것이다. 일단은 내용이 아니라 외양에서. 759쪽의 양장인 <가다라의 돼지>는, 대주술사 바키리가 쓰는 주술도구라고 해도 믿을 만큼 묵직하고 괴이하다. <가다라의 돼지>의 무대는 아프리카 케냐. 여전히 저주가 존재한다고 믿는, 아니 실재하는 곳. 그곳에서 딸을 잃었던 민족학 교수 오우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초능력 청년, 소림사 무술을 배운 제자 등과 함께 돌아온다. 그리고 사악한 대주술사 바키리와 맞서게 된다. 저주가 무슨 미스터리냐고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저주와 초능력과 심리학과 오컬트 등을 한껏 버무린 <가다라의 돼지>를 읽다 보면 그런 의문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호러, 코미디, 모험소설, 가족 드라마, 사소설 등을 종횡무진 섭렵하며 내달리는 <가다라의 돼지>는 미스터리의 영역을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확장시킨다.

<내 어둠의 근원> 제임스 엘로이 지음·이원열 옮김·시작 펴냄

〈LA 콘피덴셜〉 <블랙 달리아>의 작가 제임스 엘로이. 그는 왜 범죄소설을, 그것도 어둡고 관능적인 ‘일급 살인’의 판타지에 몰두하게 된 것일까? 논픽션 <내 어둠의 근원>은 제임스 엘로이가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그의 심연에 무엇이 들끓고 있었는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폭력적으로 웅변한다. 1958년 그가 열살이었을 때, 엄마인 진 엘로이가 살해당했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내 어둠의 근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파괴적으로 치달았던 엘로이의 지독한 성장의 기록이다. 술, 마약, 노출증과 스토킹, 사소한 범죄와 구치소 생활 등 ‘백인 쓰레기’처럼 살았던 엘로이는 서른이 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비극적 실화에 투영하여 재구성한 <블랙 달리아>로 명성을 얻었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고 어머니를 욕망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어버렸다.’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왜 우리가 범죄물에 매혹되는지 알고 싶다면 반드시 봐야 할 책.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얼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이규원 옮김·북스피어 펴냄

추리소설 작가로서 미야베 미유키의 장점은 르포작가처럼 성실한 태도이다. 에도 시대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시리즈에 속하는 <얼간이>는 에도 시대의 풍속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첫머리를 읽을 때는 뎃핀 나가야라는 주상복합형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슬프고도 정다운 사연을 다룬 옴니버스 구성인가 싶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하나의 수수께끼로 모아지는 과정도 흥미롭다. 그래도 작가로서 미야베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을 향한 이해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가끔 악행을 저지르지만 언제나처럼 작가는 섣불리 비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제목에 나온 얼간이는 과연 누구인지 묻는다. 사람 좋은 무사 헤이시로인지, 자신의 행동도 돌아보지 못하는 악인들인지. 혹은 마음속 어둠을 못 보는 우리일지.

<소수의견> 손아람 지음·들녘 펴냄

소설의 앞머리에 이 책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고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아현동 뉴타운 철거 현장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재판을 다룬 이 소설은 어떤 실제 사건과 딱 겹쳐지기 때문에 이 일러두기는 역설적으로 들린다. 아들을 구타해서 죽인 경찰을 살해한 아버지를 변호하는 늦깎이 변호사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선 확인할 길 없는 진실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철저히 허구이다. 추리적 요소가 강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을 고른 이유는 당대에 대한 고민이 있는 한국 추리소설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형식적인 동기에서이다. 하지만 소설을 당위로만 읽는 사람은 없다. 법률 용어의 홍수를 맞으며, 몇몇 도식적인 설정을 징검다리처럼 넘으면 이 소설은 법정 스릴러로서 충분히 제구실을 한다.

박현주/번역가


<마크스의 산>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정다유 옮김·손안의책 펴냄

이 소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단단하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다카무라 가오루는 다양한 미스터리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독특한 색깔을 자랑하는 작가다. 도쿄 경시청 수사 1과 7계의 사건 추적 기록을 담은 <마크스의 산>은, 표면상으로 경찰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건의 해결보다는 사건에 얽힌 인물과 그들의 사연에 더욱 집착한다. 지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조차 이야기에 꼭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인물의 성격과 심리, 경찰이라는 조직의 생리와 수사 과정의 갈등, 사건의 시작과 끝에서 다카무라 가오루는 건조하지만 치밀한 문체로 이야기를 쌓아올린다. 미스터리를 통틀어, 아니 다른 모든 문학 작품과 비교하더라도 이러한 경험은 다시 하기 힘들다. 쉽사리 읽히지도 않고 어쩌면 고통스럽기까지 한 독서 경험이지만 기회를 놓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할 작품이다.

<뉴욕을 털어라>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지음·이원열 옮김·시작 펴냄

미스터리 가운데서도 범죄를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는 ‘케이퍼 소설’이라는 장르의 이 소설은 왁자지껄 대소동이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걸작 미스터리다. 빠르게 진행되는 사건들 속에 등장인물이 나누는 대화들은 마치 입담 좋은 개그맨의 스탠딩 코미디를 보는 것만큼이나 즐겁다. 짧은 사건들이 빠른 템포로 벌어졌다가 마무리되기를 여러 번, 그러면서도 장편으로서의 일관성을 잃지 않아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간다. 대단한 반전이나 깜짝 놀랄 마무리는 없지만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에 맞닥뜨린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서 보이는 작가의 유머 감각은 한 번 올라간 입꼬리를 내려오게 할 줄 모른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악당들이라니!

임지호/북스피어 편집장


<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김미령 옮김·북홀릭 펴냄

다른 소설보다 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 가운데 하나가 ‘서술의 묘미’다. 서술 방식을 새롭게 하거나 비트는 데에서 허를 찌르는 트릭과 반전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는 이런 서술 방식의 재미가 일품인 작품이다. <속죄>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편지로 이뤄져 있다. 오래전 친구가 참변을 당하는 범죄 장면을 목격한 네 친구들이 쓴 편지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사건의 놀라운 진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올해 나온 <우행록>도 범죄 사건 관계자들의 인터뷰만으로 구성한 점에서 비슷한 구조인데, 짜임새와 재미 면에서 <속죄>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형식과 내용 모두 상큼(?)한 소설이다.

<더미> 김지훈 지음·디앤씨미디어 펴냄

모처럼 나온 괜찮은 국산 과학스릴러다. 살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 속에 담긴 무서운 진실 이야기가 여름철 서늘함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 디자인이 좀 ‘키치적’이란 점이 망설이게 할 수도 있지만 빠른 이야기 전개와 깔끔한 묘사가 계속 책장을 넘기게 한다. 이 책이 뛰어난 점은 과학적 사실을 ‘맛깔나게’ 쓴다는 데 있다. 단백질, 바이러스, 각종 화학물질이 어떤 경제적 목적에 의해 개발되어 우리를 병들게 하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한국인 과학자가 가축을 살찌우는 신물질을 개발해 떼돈을 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물질이 조미료로 더 각광받게 된다. 인체에 치명적이 될 수 있는 문제여서 과학자는 갈등에 빠지고 결국 자기가 만든 물질을 쓰지 못하게 하는 연구에 나선다는 이야기다. 먹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과학과 인간, 욕망과 자본의 본질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구본준/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이외에 더 추천하는 작품들

윤영천 | 하우미스터리 운영자

<쌍두의 악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시공사, <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북홀릭, <권력의 이동> 빈스 플린 지음·랜덤하우스 코리아

김봉석 | 대중문화평론가

<블루 노웨어> 제프리 디버 지음·랜덤하우스 코리아, <우행록> 누쿠이 도쿠로 지음·비채, <탈취> 심포 유이치 지음·노블마인

박현주 | 번역가

<우행록> 누쿠이 도쿠로 지음·비채,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데이비드 헌트 지음·작가정신, <이방의 기사> 시마다 소지 지음·시공사

임지호 | 북스피어 편집장

<어둠의 불> C. J. 샌섬 지음·영림카디널, <한시치 체포록> 오카모토 기도 지음·책세상, <쌍두의 악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시공사

구본준 |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싸이코> 로버트 블록 지음·다시, <탈취> 심포 유이치 지음·노블마인, <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북홀릭

Posted by 저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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