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뿌리로 마쓰모토 세이초 작가를 꼽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인이지요. 대단한 일을 묵묵히 해오셨어요. 지금 읽어도 빛이 바래지 않았고 널리 읽히잖아요. 존경하며 우러러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세이초 씨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었나요?”

“아뇨, 많지는 않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겠군요.”

2007년 5월에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이 미야베 미유키와 한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일본에서야 출간하는 책마다 적게는 10만 부에서 많게는 100만 부 단위로 팔아치우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던 작가의 ‘이제부터겠군요’라는 말이 나에게는 어떤 메시지 같은 형태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선배 작가에 대한 립서비스쯤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확실히 한국에서 세이초는 유행이 지난 롱코트 정도의 냉담한 취급밖에 받지 못했다. <수사반장>을 비롯한 각종 드라마에서 여러 번 ‘써먹었던’ 그의 작품들이 대개 출처 미상으로 처리되었던 것을 비롯해서 말이다. 오늘보다 더 심했을 장르와 국적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제대로 소개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북스피어/모비딕 제공
마쓰모토 세이초(위)는 마흔한 살에 데뷔해 일본의 ‘국민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고단한 삶, 소학교만 졸업


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가 발표한 작품은 장편소설이 100편, 중·단편이 350편, 에세이까지 포함하면 1000여 편이다. 현재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 관장이자 30년 동안 전담 편집자로 일했던 후지이 야스에 씨가 “미스터리, 시대소설, 현대사, 고대사까지 한 사람의 두뇌에서 이렇게 폭넓고 깊이 있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래서 유령 작가가 따로 있다느니 집필 공방이 있다느니 하는 풍문이 나돌았으리라” 하고 한탄했을 만큼 방대한 분야를 다루었다. 저서로는 700권에 달한다. 작가 생활 40년 동안 700권. 산술적으로만 보면 “정말일까?”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면의 제약으로 축약할 수밖에 없어서 클리셰(진부한 표현)같이 들릴 테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한 모차르트처럼, 가계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데뷔작 <사이고사쓰>를 썼다.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 일이다. 데뷔작을 눈여겨보았던 나오키 상 심사위원의 권유로 소설 두 편을 발표한 것이 분수령이었다. 그중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나오키 상 후보에 오른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고단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을 다룬 이 소설은 처음에 나오키 상에 후보로 올랐다가, 다시 아쿠타가와 상 본선에 올라 당선(나오키 상은 대중문학 작가가, 아쿠타가와 상은 순문학 작가가 받는다)되기에 이른다. 대중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품을 심사위원이 순문학으로 평가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넘긴’ 거다. 이를 계기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세이초는, 첫 장편 <점과 선>으로 ‘사회파 추리소설’(범죄란 사회가 갈구하는 형태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전제하에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를 추적해가는 장르) 붐을 일으키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다. 유명 작가가 된 이후에도 “나는 데뷔가 늦어서 시간이 없어. 너무 없어”라는 말을 하며 취재로 돌아다는 일 외에는 서재에 틀어박혀 글만 썼다고 한다. 전성기 때에는 연재물을 10개(신문 2개, 주간지 3개, 월간지 5개)나 동시에 진행한 적도 있는데, 아마 이러한 작업량 때문에 여러 명의 견습 작가를 두고 그들이 쓴 글을 세이초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북스피어/모비딕 제공
일본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에는 세이초가 출간한 책 표지가 전시돼 있다(위).


그에게 쓴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수단이었을까. 자신에 대해 거론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쓰고 싶었기 때문에 썼을 것이다. 즐거웠으니까. 작가 소득 랭킹에서 줄곧 톱이었음에도 부와 작업량이 반비례하는 일은 없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한마디에서 출발해 작품을 읽고 세이초의 생애에 감명을 받은 내가 바다 건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작품들을 압축해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을 펴내는 일 정도였다. 북스피어가 독자적으로 손대기에, 그는 너무 크고 너무 넓었다.


세이초 선집의 첫 책들.
작은 출판사들의 합동 프로젝트


그러던 차에 나처럼 세이초의 팬이 된 역사비평사(모비딕) 조원식 실장이 출판사 연합으로 판형과 디자인을 통일해 세이초의 작품을 펴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왔다. 세이초에 대한 그의 공부는 이미 상당했다. 되풀이하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리 작가이자 역사가이기도 한 사람이다. 추리 작가이자 역사가인 세이초의 방대한 저작들을 북스피어와 역사비평사가 힘을 합쳐 낸다. 규모가 작은 출판사들도 연대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금과 조직을 보완하면 이런 프로젝트의 진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결과론이지만 나쁘지 않은 출발인 듯하다. ‘세이초 월드’의 첫 책인 <D의 복합>(모비딕)과 <짐승의 길>(북스피어)을 함께 만드는 동안에는 성격 안 맞는 부부처럼 ‘사랑과 전쟁’도 여러 편 찍었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를 제대로 만들었다는 기쁨 그 자체가 하나의 보상이 되었다. ‘한국은 어떤가요? 세이초 씨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었나요?’ 다음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예, 스물일곱 편가량 번역되었습니다. 한참 남았지요. 이 세계(Seicho World)는 정말 끝이 없네요. 그래서 즐겁기도 하지만.’
Posted by 저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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