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이종찬 기자]

'한국 문단의 큰 별'이 툭 떨어졌다. 우리 시대 탁월한 작가 박완서가 그다. 고 박완서 선생은 그동안 담낭암과 싸우다 매섭게도 추운 22일(토) 새벽 6시 17분께 먼 길을 훌쩍 떠나고 말았다. 고인은 지난해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을 꽤 회복하는 듯했으나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지난해 펴낸 마지막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그 길을 따라가듯이. 향년 80세.

너무 슬프고 너무 가슴 쓰리다. 특히 2011년 올해는 고 박완서 선생 등단 41주년을 맞이하는 해가 아닌가. 사실 기대도 컸다. 한 시대 탁월한 작가가 쓰는 뛰어난 작품을 한 편이라도 더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싶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인은 늦깎이인 40살에 <여성동아>에 장편소설 '나목'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해 단숨에 우리 문단을 뒤흔드는 탁월한 작가로 거듭났기 때문이었다.

우리 문단에서 '한국문학의 친정어머니'로 불릴 만큼 힘들고 어려운 문인들을 남모르게 돌봐주었고, 문인들 불행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고 박완서 선생. 그가 없는 우리 문단, 그가 없는 우리 문인들은 이제 누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단 말인가. 친정어머니 없는 이 추운 문단에 둥지를 틀고 있는 문인들은 이제 누구에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단 말인가.

고 박완서 서거 소식을 들은 소설가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오늘 새벽, 박완서 선생님께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내시고,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올려 저승길을 배웅했다. 그때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꿈이 몹시 어지러웠다. 목이 너무 타 일어나 물을 한 모금 벌컥벌컥 마신 뒤 TV를 켰다.

mbn이었다. 30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박완서 선생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mbn에서는 박완서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동안 펴낸 책들을 소개하며 고인이 남긴 업적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한동안 넋이 나갔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 말만 자꾸 흘러나왔다.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

"이소리, 어머니 시집 정말 잘 읽었어. 시를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참 많이 흘렸어. 그래도 이 시인 어머니는 57살이란 나이에 안타깝게 돌아가셨지만 참 좋은 시인 아들을 두었어. 나도 그런 시인 아들 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어. 나가자. 내가 잘 못 마시는 술이라도 오늘은 꼭 한 잔 낼게."

그때가 아마 1990년대 허리춤께였을 것이다. 내가 울 어머니가 돌아가신 1년 기일에 맞춰 <어머니, 누가 저 흔들리는 강물을 잠재웁니까>란 네 번째 시집을 낸 뒤였으니까. 그해 가을, 박완서 선생이 송파에 있는 한 아파트에 살 때였다. 작가 이남희 선생과 함께 선생님 댁을 찾아갔었다. 박 선생과 관련된 책 기획 때문이었다.

그날 박완서 선생은 작가 이남희와 나를 데리고 집 가까이 있는 상가로 데리고 나가한 음식점에 앉아 청하를 자꾸 시켜 우리가 취하도록 마시게 했다. 선생도 꽤 드셨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선생 모습을 이날 바라본 이남희는 내게 귓속말로 "선생님께서 오늘 기분이 매우 좋으신가 봐"라고 속삭이기까지 했다.

고 박완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개성 가까이 있는 개풍에서 태어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다. 그 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서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잇달아 뛰어난 작품을 수없이 발표했다.

그는 전쟁과 분단 등 우리 현대사가 어쩔 수 없이 혹은 스스로 잘못으로 겪어야 했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 스스로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일까. 그가 평생에 걸쳐 쓴 작품에는 우리 시대가 겪는 깊은 아픔과 서민들 슬프고 쓰라린 삶이 담겨 있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 물질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황폐한 인간성도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가 책을 펴낼 때마다 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장편소설로는 <휘청거리는 오후><서 있는 여자><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미망><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아주 오래된 농담><그 남자네 집><그 여자네 집>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는 <엄마의 말뚝><꽃을 찾아서><저문 날의 삽화><한 말씀만 하소서><너무도 쓸쓸한 당신><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으며, 동화집으로는 <나 어릴 적에><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부숭이의 땅힘><보시니 참 좋았다> 등이 있다.

▲ 박완서 마지막 수필집 지난 해 8월 펴낸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 현대문학

수필집으로는 <세 가지 소원><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살아 있는 날의 소망><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어른노릇 사람노릇><두부><호미> 등이 있으며, 2010년 낸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마지막 작품집이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장녀 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 등이 있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평소 "문인들은 돈이 없다"며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발인은 25일 오전이며,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별이 많이 지고 나면 더 캄캄해진다"

"이 시대 한국문학의 큰 별이 졌다. 참으로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지난해 법정스님에 이어 언론인이자 우리 시대 지성이라 일컫는 리영희 교수가 가더니, 올해 들어 이돈명 변호사와 박완서 소설가까지 가시다니. 날씨도 하필 징글맞게 추운 이때... 이제 남은 우리 문인들 할 일이 더 많아졌다." -한국문학평화포럼 홍일선 회장

고 박완서 선생 타계 소식을 들은 문인들은 한결같이 한 시대 탁월한 작가가 떠나는 길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여기저기 손전화를 걸었으나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원로문인들은 거의 받지 않았다. 고은 시인과 김용택 시인, 임헌영 문학평론가 등은 짤막하게 "고인의 명복을 빈다" 혹은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보자"라는 말만 남겼다.

언론인이자 시인인 윤재걸은 "이명박 정부 들어 별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라며 "밤하늘을 비추던 별이 많이 지고 나면 더 캄캄해진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문인들이 정신을 더 바짝 차리고 고인이 못다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되뇌었다.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승철 사무총장은 "고인은 무슨 행사가 있을 때 앞장서서 나서기보다 늘 뒤에 서서 남모르게 도왔다. 고인이 남긴 빈자리가 너무 크다"고 가슴 아파했다.

작가 김영하는 자신이 꾸리는 트위터에 "'올 겨울 추위는 유별나다. 눈도 많이 왔다.' 박완서 선생님이 딱 10년 전에 쓰신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서두, 다시 보니 예사롭지 않구나. 먼 길 편히 가소서.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썼다. 페이스북에도 시인 김판용, 김이하, 이위발 등 여러 사람이 추모글을 줄줄이 매달았다.

작가 은희경은 한 언론과 전화통화에서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뵈올 수 있었으면… 추모를 하지 못하겠다. 많은 게 후회될 뿐. 강한 분이 앓을 때 얼마나 두려울까 하면서도 오지 말란다고 안 갔던 게 후회되어 눈물(이) 흐른다"며 "눈물을 멈추고 일어나 검은 옷을 찾기 시작한다. 없다. 선생님이 오랜만에 나를 집에 가게 하신다"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여야 정치권도 22일 소설가 박완서 타계소식을 듣고 한 목소리로 "한국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고 고개를 숙였다. 배은희 한나라당 대변인은 "고인은 유려한 문체로 일상과 인간관계를 생생히 그려낸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문학계의 거목이다. 특히 물질중심주의와 여성억압에 대한 현실묘사로 한국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며, 고인에게 고개 숙였다.

이춘석 민주당 대변인도 "고인은 우리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눴던 우리 시대의 대표적 소설가였다"고 애도했고,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서민의 애환과 역사적 아픔, 여성의 사회적 고충을 가장 친근한 언어로 호흡해온 고인의 작품은 오래도록 우리 국민과 함께 살아있을 것이다. 평화 속에 영면하기를 빈다"고 애도했다.

▲ 1991년 강화도기행에서 1991년 가을 강화도기행에서(가운데가 박완서 선생, 왼쪽이 나)
ⓒ 이종찬

"훌륭한 분들은 늘 그렇듯 우리 곁을 일찍 떠나시는군요"

"고1 입학하고 봄쯤 나는 어딘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국어시간 교과서에 실린 '그 여자네 집'을 읽고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젠 내용조차 희미해져버린 단편... 왜 눈물이 났을까. 박완서님은 그 순간 그렇게 내 추억 속에 살아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Nalain7 날랭

네이버 실시간 검색 '박완서 별세'란에도 추모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트위터 아이디igreego는 "아침에 슬픈 소식이군요. 박완서 작가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썼고, 트위터 아이디dueveck는 "1분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본 뉴스가 박완서 작가님 별세소식이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슬퍼했다.

트위터 아이디k_kihoon는 "1분전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훌륭한 분들은 늘 그렇듯 우리 곁을 일찍 떠나시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고, santamonk는 "박완서님의 별세소식에 마음이 숙연해지네요. 박 작가님의 소설도 좋았지만 '아주 오래된 농담'이나 '나의 아름다운 이웃' 등 세상 속에서 건져낸 따스한 이야기와 재치를 느낄 수 있는 콩트들을 참 좋아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되짚었다.

트위터 아이디life_dream_love는 "박완서 선생님 편히 쉬세요. 생각으로 넘어갔다... 불안함은 항상 정확하다고 했던가... 박완서 선생님의 별세소식에 대한 뉴스가 넘쳐나고 있었다. 옆집 할머니처럼 좋은 말, 재미있는..."이라고 썼고, So, I can smile♡는 "1분전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고개 숙였다.

withMBC는 "작가 박완서님... 별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며 글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트위터 diveintojay는 "어머... 진짜 한참 굳어있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고 박완서 선생 이름은 지금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에 올라 있다.

Posted by 저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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